'무작정 스크랩하기'에 해당되는 글 7건

  1. 2009/11/16 고대 이집트의 유산 2 - 피라미드 2
  2. 2009/11/16 고대 이집트의 유산 2 - 피라미드 1
  3. 2009/11/12 고대 이집트의 유산 1 - 스핑크스 2
  4. 2008/04/11 팜므파탈 '클레오파트라'(2)
  5. 2008/04/11 팜므파탈 '클레오파트라'(1)
  6. 2008/04/10 이집트문명 - 투탕카멘의 관을 연 고고학자 하워드 카터(2)
  7. 2008/04/10 이집트문명 - 투탕카멘의 관을 연 고고학자 하워드 카터(1)

고대 이집트의 유산 2 - 피라미드 2



피라미드의 수난 1 앞서 언급한 대로 당시의 이집트 종교는 죽은 자는 다시 부활한다는 것으로 믿고 있었다.
지하 세계에서 심판을 받고 부활하는 영혼은 살아있을 때의 자기의 육신을 매개체로 생명을 다시 받게된다. 따라서 그의 육신은 다시 부활할 때까지 파괴되지 않고 완벽하게 보존되어야 했다.
파라오들은 사후에도 그의 시신이 미라로 제작되어 완벽하게 보존할 목적으로 거대한 무덤을 축조했다. 그러한 목적으로 만든 무덤들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피라미드 군들이다. 이집트에는 지금 크고 작은 80여 개의 피라미드들이 남아있다.

죽은 뒤에도 다시 죽지 않으려는 염원이, 영생을 얻기 위한 일련의 작업들이 남겨놓은 것들이 피라미드 그리고 룩소르 등지에 있는 계곡을 파서 만든 지하무덤들이다.
피라미드가 건축된 시기는 고왕국, 고왕국 중에서도 제3왕조-제6왕조에 해당된다. 이집트 역사학자들은 이 시기를 피라미드 건축시기라고도 한다..
역사상 처음으로 피라미드를 건축한 군주는 제3왕조의 2대왕 Zoser이다. 우리가 알고있는 사카라(Sakkara)의 계단식 피라미드의 주인공이 바로 이 왕이다. 이 피라미드를 설계하고 건축한 사람은 Zoser왕의 재상이며, 제사장이고, 의사이며, 사상가이자 건축가였던 임호텝이라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피라미드 역사의 진정한 주인공은 제4왕조(기원전 2,723-2.563년)에서 나타난다. 제4왕조의 초대 왕은 스네프루였는데, 그의 무덤은 우리가 알고 있는 다르위쉬 지역의 그 굴절피라미드이다. 그 후, 그의 후계자 쿠푸(Kufu)가 가장 아름답고 완벽한 대 피라미드를 기자(Gize)지역에 세웠다고 알려져 있다.
새로운 파라오가 등극하면 궁정에는 그가 죽은 후에 그 시신을 보존할 새로운 무덤공사가 곧바로 시작된다. 인력동원반, 자재수급반, 식량 조달반, 피복반, 건축설계반, 채석 및 그 운반반 등등.. 기록에 의하면 그들은 1년 내내 건축을 한 게 아니라, 나일강이 범람하는 농한기만을 이용했고, 필요한 인력동원은 우리가 잘못 알고 있듯이 전쟁터에서 노획한 노예들을 동원한 것이 아니라, 자연인들을 그것도 충분한 노임을 지불하고서 동원했다고 기록되어져 있다.

091112_egt_015

주의 깊은 역사가들이 알고 있는 한 대피라미드 안에서는 어떠한 미라(시체)도, 황금관도, 장례도구도 발견된 바가 없다.
대피라미드 내벽에는 초기 이집트의 다른 어떤 무덤에서나 발견할 수 있는 상형문자나 부조도, 死者의 생활을 묘사한 벽화도 없다.
내부구조는 단순하고, 파라오들이 자기무덤을 치장하기 좋아했던 요란한 장식물도 없으며, 이 고대의 가장 중요한 무덤(?)에서 충분히 기대할만한 장식물들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 것이 군주의 무덤이었다는 결정적 증거로 간주될 수 있는 점은 아마도 왕의 석실 바닥에 놓여있는 붉은 화강석으로 만들어진 뚜껑 없는 빈 관의 형태를 가진 석조물일 것이다. 이집트 학자들은 이것은 분명히 왕의 석관이었을 것이다고 말해였고, 그러므로써 피라미드가 무덤이라는 사실은 확정되었다고 여겨졌다.
하지만 단지 그 하나의 석조물 만으로 피라미드를 무덤이라고 정의하기에는 여러가지 의문들이 제기 되고 있다.
만일 이것이 분명 왕의 석관이었다면, 그 석관의 옆면에는 왜 관습적인 宗敎畵나 경전구절들이 새겨져 있지 않은가?
다른 모든 석관들에는 그것이 사용된 내력이 글(상형문자)이나 그림으로 새겨져 있다. 그런데 이것이 이집트의 가장 이름 높은 왕의 석관이었다면 어째서 상형문자가 남아있지 않았을까?
석관으로 추정되는 것이 놓여 있는 석실에 外氣와 통하도록 60미터가 넘는 길이의 공기통로가 뚫려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미라는 신선한 공기가 필요치 않으며 석실의 지붕을 일단 덮은 후에는 작업인부들이 다시 들어갈 수 없도록 입구를 밀봉 버리는 것이 당시의 관례였다. 이집트의 어떤 왕의 무덤(석실)에도 공기통로는 없다.
관으로 추정되는 석조물은 왜 지상에서 45미터나 높은 곳에 있는 방에 놓여져 있을까? (대개의 고대 이집트의 묘실(廟室)은 암반을 파 내려간 지하에 있다.)
또한 왕의 석실로 들어가는 통로에는 왜 그리 높다란 대 회랑을 만들어 놓은 것일까?
왕비의 석실이라고 불리는 제2실은 왜 제1실 부근에 이어진 것일까? (파라오들은 결코 왕비와 함께 묻힌 경우가 없다.)
그리고 2실에도 공기통로는 왜 나있는 것일까?

죽은 자는 숨을 쉬지 않는다는 이 사실을 우리는 상기할 필요가 있다.
엄청난 물자와 돈과 노동력을 투입한 진정한 목적을 알고자 하는 노력과 지성은, 마땅히 예언설이니, 무덤이니 하는 가설에 한정할 것이 아니라 뭔가 다른 해답을 찾아 눈을 돌려야만 하지 않을까?
그 까마득한 고대에, 증기기관차도 전기력도 없었던 시기에 이 사면체의 유산을 남겨놓기 위해 거대한 돌덩이들을 캐내어서 운반하고 설계된 정확한 자리에 쌓아 올린 그 기술은 우리의 찬탄을 자아내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 우리가 바라보는 피라미드는 고대인들이 보았던 그 피라미드가 아니다.
그들이 보았던 것은 정교하고 매끄럽게 광택을 낸 석회암으로 사면이 덮여있어서 태양빛을 눈부시게 반사하고 있어서 그 옛날 이집트 사람들이 불렀던 이름 그대로 "빛" 이었다.
블록의 각 면은 완전한 평면으로 모자이크처럼 정교하게 짜 맞추어진 접합부는 회반죽으로 정교하게 처리하여 이음새가 전혀 보이지 않았었다. 이 사면체는 마치 거대한 거울처럼 햇빛을 반사하여 까마득히 먼 곳에서도 눈에 띄었다. 상형문자가 새겨진 이 석회암 표면은 12세기 말까지만 해도 남아 있었는데, 압둘 라티프는 그 광경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 이 돌에는 지금은 해독이 불가능한 고대의 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나는 이집트를 통틀어서 그것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을 찾을 수가 없었다. 새겨진 글은 너무나도 방대해서 두 개의 피라미드 표면에 새겨진 것만 해도 베낀다고 한다면 대충 6천 페이지 분량은 될 것이다."

한때 매끄러웠던 표면은 오늘날에는 계단모양으로 깎여나가 버렸다. 수 많은 外面石 중에서 단 몇 개의 基壇 部 블록만 제자리에 남았을 뿐이다. (제 2 피라미드 상층부에 아직 그 때의 모양이 남아있다. 물론 빛은 반사하지 않지만) 그 외면 석은 카이로 남쪽 모카담 山에서 가져온 것으로 추정된다.
1200년경 카이로 전역을 산산조각으로 만들어 버린 대 지진이 발생하여 이집트를 뒤 흔들었다. 그러자 아랍인들은, 터키인과 그리스인들이 자신의 집을 짓기 위해 거룩한 파르테논신전을 채석장 삼아 초토화시켰던 것처럼, 무너진 집들을 재건할 건축재료를 구하러 대 피라미드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광택나는 四面의 흰 외면 석을 탐욕스럽게 벗겨내고, 상층부(꼭대기)의 돌들을 9m나 끌어내려 카이로로 가져갔다. 어쩌면 이집트 수도의 수많은 집과 모스크와 성벽들이 그 두꺼운 벽속에 한때 대 피라미드의 사면에 새겨져 있던 상형문자를 감추고 있을지도 모른다. 저 유명한 술탄 하싼 모스크의 일부도 이 외면 석으로 지어졌다. 피라미드를 이루고 있는 돌들은 상당한 규모의 시가지 하나를 건설할 수 있는 양이다. 그들은 피라미드 전체를 뜯어갈 수도 있었지만, 단 한 개의 석조 블록을 뜯어내는 시간과 노력이 그 값어치에 비해 너무나 크고 힘든 작업이라는 것을 깨닫고 더 이상의 파괴를 포기하였다.
안타깝게도 피라미드의 꼭대기의 일부를 파괴하고 난 후였다. (지금 피뢰침처럼 보이는 원래의 높이를 표시한 구조물이 세워져있다.)

오늘날 관광객들이 사용하는 입구는 고대 이집트인들이 사용했던 원래의 입구가 아니었다. 현재의 입구는 한 끈기 있는 아랍의 왕이 상당한 재력과 많은 노동력을 동원하여 밀봉된 입구의 비밀을 강탈함으로써 생긴 흔적일 뿐, 대 피라미드의 은밀한 통로와 밀실들은 이집트 무모한 인간들과 그리스와 로마의 지배자들의 눈을 한결같이 속였고 로마인들이 물러가고 나서도 입구에 관한 전설은 여전히 남아있어서, 그 위치는 밝혀지지 않았다. (다음 편으로...)


Artists impression of the main pyramid complex

Ground Plan of the Great Pyramid Complex of Khufu


**참고 문헌**
A Search in Ancient Egypt - Paul Brant,
Ancient Egypt - Lienel Casson
이야기 세계사 - 김 경묵, 우 종익 편저
이집트 자료실 - 대영 박물관
고대 이집트 문명의 이해 - 이집트 박물관
이집트 여행 - 크리스티앙 자크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Trackback 0 Comment 0

고대 이집트의 유산 2 - 피라미드 1



피라미드 인류의 문명은 지금으로부터 2만년-1만년 전 사이에 생겨나서 오늘날과 같은 인류로 그 문화적인 진화를 시작하였다.
인류는 각각 나름대로의 문명을 일으켰다. 그 중 가장 일찌기 문명단계에 들어선 것은 기원전 3,500년경에 시작된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이집트 문명을 들 수 있다.
이 곳은 나일강 하구(Delta)와 메소포타미아, 이른바 이 두 지역 사이에 펼쳐진 동부 지중해 연안의 비옥한 초승달 지역이었다. 이 두 문명의 뒤를 이어 황하 문명과 인도 문명이 새로이 나타나는데 공교롭게도 이 4대 문명의 발상지들은 모두 다 지구의 북반부에 위치하고 있었고 큰 강을 끼고 있었으며 온대 지역의 기후가 좋고 비옥한 토양을 지닌 지역들이었다.

고대 이집트는 처음에 상하 두 왕국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그러다가 BC 3,200년경 메네스(Menes)라는 걸출한 인물이 나와 상하 이집트를 통일하고 나일강 하류의 멤피스에 이르는 약 1천 km 에 달하는 긴 지역을 지배하는 단일 왕국을 세웠다. 이 통일 왕국은 이 후 2,000년 동안 지속되어 이집트는 하나의 지배자, 하나의 종교, 하나의 정부형태에서 찬란한 문명과 문화를 지속했다.
그러나 이집트는 20여 왕조라는 긴 세월 동안 여러 번에 걸쳐 흥망성쇠를 거듭하였었다.

091112_egt_011

최초의 피라미드들은 왕을 위한 거대한 무덤들이었다.
지금부터 얘기하려는 기자(Gize)의 대 피라미드는 그 높이가 145미터(현재는 136 미터만 남아 있음)에 달하고 소요된 돌의 무게가 6 백만 톤, 각 변의 길이가 250미터로 오늘날에 와서도 그 오차는 불과 20cm라니 당시의 기하학 및 건축술이 얼마만큼의 수준이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고대의 이집트의 왕, 파라오는 神의 化身이었다.
파라오는 이집트의 중심이었고, 이집트는 우주의 중심이었다. 이집트 백성들에게 파라오는 태양신 Ra( Ra 또는 Re)의 아들로 파라오는 죽고 나면 지하세계(저승) 및 나일강의 신인 오시리스와 결합되어 한 몸이 된다. 그리하여 저승에서도 파라오는 신으로 부활하여 나일강의 범람을 조절하며 그로 인해 곡식은 결실을 맺게 되는 것이다. 또한 파라오는 살아있는 신이기 때문에 이집트의 전 국토는 그의 재산이었다. 그는 모든 권력의 수장이었고 그의 말은 곧 법이었다.
파라오들은 이제 증발하기 쉬운 유령에 지나지 않지만, 피라미드들은 자신들이 딛고 서있는 암반의 엄연한 일부가 되어 견고하고 거대한 기념물로써 여전히 우리와 함께 있다.

고대 이집트는 여전히 현대세계의 흥미와 주목을 끌고 있다.
로마의 플리니우스는 3개의 피라미드가 이 땅을 그 들의 명성으로 가득 채웠다고 썼지만, 우리는 그가 글을 쓴지 2천 년이 지난 오늘 날에도 피라미드들은 그 명성을 조금도 변함없이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피라미드의 명성은 플리니우스 시대보다도 더 멀리 퍼져나갔고 수많은 관광객들이 줄을 지어 찾아오고 있지 않은가? 5천 년 전의 그 원시시대 사람들이 사막의 대지 위에 자연의 창조물에 필적할 이 괴물 같은 인공의 산을 손으로 쌓았을까 하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면 우리는 그저 놀라서 어안이 벙벙해질 따름이다.
그리스 정복자들이, 그리고 알렉산더 시대의 그리스의 성현들이 세계 7대 불가사의 목록을 작성할 때 그들은 피라미드를 그 첫 번째로 꼽았다. 오늘날 그 7가지 중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것이 이 피라미드뿐이다.

나폴레옹이 이집트를 정복할 때 데리고 간 과학자와 전문가들에게 이집트 국토조사를 위임했을 때 그들은 대(大)피라미드를 중심으로 삼아 거기서부터 경도를 재었다.
그들은 하류 이집트의 지도를 완성했을 때 이 중심 경선이 하(下)이집트를 거의 차지하고 있는 델타지역을 양분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리고 피라미드에서 직각으로 대각선을 그으면 그 안에 델타 지역이 완전히 들어간다는 사실에 더욱 놀랐다. 또한 연구 끝에 대피라미드의 위치가 단지 이집트 중심 경선으로서만 적합한 것이 아니라 지구 전체의 중심경선으로, 세계지도의 중앙 분할선 상에 놓여있던 사실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피라미드를 통과하는 세로선을 그으면 지상에 있는 동편의 육지와 서편의 육지면적이 동일함을 발견하게 된다. 사실상 대피라미드의 경도는 지구를 통틀어서 제로(Zero)선이 되는 셈이다.
이처럼 지구상에서 대피라미드가 차지하고 있는 육지상의 위치는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인간이 만든 기념물로서 이 경이로운 지리적 위치가 어쩌다 들어맞은 우연인지. 아니면 지능적이고 빈틈없는 인류(피라미드를 건축한)가 의도적으로 고려한 것인지를 생각해 보자면 그 후자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가 없다. 더욱이 위치와 완벽히 조화를 이루는 것은 피라미드의 네 斜面이 나침반상의 네 방위를 정확히 향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이 무수한 여행 책자들은 제1의 대피라미드는 그리스인들에 의해 Cheops라고 재 명명된 제4왕조의 쿠푸(Kufu)에 의해 세워졌고, 그는 왕의 신분에 어울리는 최상급의 무덤, 실로 신기원적인 무덤을 원했던 것이며 이것이 대피라미드에 관한 사실의 전부라고 입심 좋게도 떠벌린다.
과연 이것이 전부일까!?

이 고대의 건축물에 대해서는 물론 비정통적인 說도 있다.
완전히 황당무계한 것으로부터 과학적인 타당성까지 다종다양하다.
피라미드를 세운 목적이 '나일강이 먼 옛날에 인공적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라는 황당한 주장으로부터, 국토조사를 목적으로 지어졌다는 주장, 야곱의 아들 요셉이 기근을 대비하기 위하여 곡식창고로 지었다는 주장. (그러나 피라미드 내부는 옥수수 같은 곡식을 저장할 공간이 전혀 없다.) 천문학자 프록터는 피라미드가 별들의 운동을 관측할 적합한 장소로 시용하기 위해 세워졌다는 이론을 주장했다. 그러나 과연 오로지 별들을 관측하기 위해 그처럼 비싼 대가를 치르며 피라미드를 세웠을까?
이에 못지않게 황당한 것은 그 밑에 엄청난 황금과 보화가 감추어져 있다는 주장이다. 다른 이론가들은 피라미드가 원래 나일강을 지나가는 배들을 위한 거대한 등대였다고도 확신했다.
이 모든 주장들이 오늘날 이집트인들로부터 웃음만 살 뿐이다.

한편 색다른 이론가들이 있다. 그들은 이렇게 주장한다.
"내부의 대 회랑과 통로들을 측정해 보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로 데려다 주는 데에 소용되는 정확한 햇수가 인치로 표시되어 있음을 발견한다. 대 회랑의 길이는 1,883인치이다. 여기에다 우리 주님의 속죄기간으로 피라미드에 기록되어 있는 햇수인 31을 더하면 세계대전이 일어난 1,914년이 된다."
그들은 피라미드가 그것을 지은 자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가올 시대에 은혜를 주기 위해서 이타적으로 세워진 것이며. 이른바 천년 왕국이라는 시대와 특별한 관계가 있다고 확신한다.
이러한 황당한 주장을 펼친 자는 스코틀랜드 출신의 전직 천문대장, Piazzi Smyth였다.
그들은 피라미드의 건설 연대가 기원전 2.170년이었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바로 그 해에 특정 북극성(오늘날의 북극성이 아님)이 통로의 입구와 일직선상에 놓였으며, 그들은 이 별의 빛이 통로에 비추어지도록 통로의 각도가 맞추어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별들은 지구의 세차운동에 의한 춘분점 세차(72년마다 춘분점이 1도씩 이동)로 인해 원래의 위치로부터 이탈되며 약 26,000 (25,920년)이 지나기 전에는 같은 위치로 돌아오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들의 주장에 따른다면 피라미드는 기원전 2,170년이 아니라 25,920년 전에 세워졌어야 맞는 것이다.
피라미드의 단단한 구조는 3만년의 풍파를 얼마든지 견뎌낼 수 있다. 그 견고성과 내구성으로 말할 것 같으면 지상의 모든 건물들이 허물어지더라도 피라미드만은 남아 있을 것이다. 이렇듯 어마어마하게 크고, 정교하고, 단단한 구조를 가지고 전례 없는 막대한 경비와 노동력으로 건설된 이 거대한 구조물이 현존 인물이나 그 시대 다음 사람들을 위한 것도, 혹은 이집트 후손들을 위한 것도 아니라, 거의 5천 년이나 후에, 그것도 다른 대륙에 살 사람들을 위해 지어진 것이라는 주장은 이성을 지닌 사람이면 동의하기 어려운 것은 당연하다.

피라미드의 진정한 용도와 스핑크스의 상징적인 의미는 이집트가 그 땅의 주민들과 방문자들에 내놓은 가장 매력적이고 흥미로운 두 가지 수수께끼이지만, 가장 풀기 어려운 수수께끼 이기도 하다.



**참고 문헌**
A Search in Ancient Egypt - Paul Brant,
Ancient Egypt - Lienel Casson
이야기 세계사 - 김 경묵, 우 종익 편저
이집트 자료실 - 대영 박물관
고대 이집트 문명의 이해 - 이집트 박물관
이집트 여행 - 크리스티앙 자크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Trackback 0 Comment 0

고대 이집트의 유산 1 - 스핑크스 2



스핑크스.. 그는 끝없이 펼쳐진 사막 속으로부터 우뚝 솟아 누워있다.
웅크려 누운 몸체와 성스러운 이 얼굴은 미신적인 베드윈 족에게는 "공포의 아버지(Abu El Haram)" 라고 불리 울 만큼 두려운 존재였으며 처음으로 대면하여 입만 딱 벌린 채 바라보고 있는 의구심 많은 여행객들에게는 이 형상은 예나 지금이나 의문의 대상이다. 누가 조각했는지 아무도 모르며 이집트학의 권위 있는 전문가들도 그 의의와 역사를 막연히 추측해 볼 뿐이다.

091112_egt_001

아틀란티스 대륙...
지금의 지중해 어느 지점에 존재했으나 지각 변동으로 바닷속으로 살아졌다고 전해지고 있는 신비의 대륙.
스핑크스의 기원이 이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고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 나이를 그 누가 감히 헤아리겠는가.
아틀란티스는 그리스의 철학자나 이집트의 신비사제들, 그리고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었다. 많은 과학자들이 그것이 존재했다는 수많은 증거와 그 이상의 내용들을 수집해 놓고 있다.
스핑크스가 처음 바위로부터 조각되었을 때 주위의 저 지대가 모래로 덮여 있을 리가 없었을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피라미드가 서있는 언덕 가장자리의 바위절벽 자체 또한 모래 밑에 파묻혀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석상은 모래가 나타나기 훨씬 이전, 사하라 사막은 거대한 바다였으며 그 너머에는 위대하고도 비극적인 아틀란티스 섬이 있던 시기에 조각되었을 가능성이 훨씬 더 많다. 선사시대에 이집트에 살았던 사람들, 스핑크스를 세우고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을 이룩해 놓았던 그들은 사하라사막을 물위로 들려 올리고 아틀란티스를 대양 밑으로 가라앉게 만든 비운의 지각 변동 이전에 탈출해 나왔다. 사하라사막 곳곳에는 오늘날도 널려있는 조개 껍질들과 모래 속에서 발견되는 물고기 화석들은 이 곳이 옛날에는 바다였음을 증거한다.


스핑크스가 잊혀진 세계, 미지의 아틀란티스 인들이 조각했을 것이라는 생각은 엄청나고 놀라운 발상이었다.
그 대답의 몇 가지 힌트를 얻기 위하여 그 역사적 기원이 아틀란티스로 거슬러 올라가는 곳으로 보이는 민족들의 문화유산들을 살펴봐야 한다.
잉카 족이나 마야 족들의 거의 퇴화되어가는 종교의식의 배후를 답사해 보면 그들의 먼 조상들의 예배의식 중에 그들이 숭배한 가장 높은 대상은 태양으로 대표되는 빛이었음을 발견 할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고대 아메리카 전역에 피라미드 모양의 태양신전을 지어 놓았던 것이다. 이들 신전들은 아틀란티스에 있었던 신전들을 변형한 것이거나 약간 왜곡하여 본뜬 것이었다.
플라톤이 이집트의 헬리오폴리스에서 13년 간 공부하던 시절, 외국인에 대하여, 매우 조심스러웠던 秘義의 스승들도 이 젊고 열성적인 그리스의 제자에게만은 그들이 은밀히 간직하던 비밀기록들에 근거한 증거들을 알려 주었다. 그 중에는 "아틀란티스 섬의 중앙에는 꼭대기가 평평한 피라미드가 서 있었고 그 위에는 대신전이 태양신전이 세워져 있었다는 사실"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집트로 배를 타고 온 이주자들은 이 종교를 간직하고 왔으며 그와 비슷한 신전들을 건축했다. 이집트의 거대한 탑문들과 피라미드 식 무덤에서 이 아틀란티스의 유산의 특징을 읽을 수가 있는 것이다.
이집트의 신들 중에서도 태양신은 늘 으뜸자리에 있었다.
그들은 거대한 조형물을 만드는 취미로 석조 거인상에 대한 애착이 깊었다. 멕시코, 페루, 유카탄 반도 등에 아틀란티스의 문명을 이어받은 듯한 신전폐허들이 엄청난 크기의 돌로 빈틈없이 짜여있으며, 이집트의 건축 양식과 대동소이하여 신전의 앞마당이나 입구에 따라 발견되는 거대한 석상들 속에서 우리는 동일한 혈통임을 유추할 수가 있다. 가라 앉은 대륙의 산봉우리인 이스터섬의 유적인 석조인물상은 단지 8미터 밖에 안 되는 높이로 스핑크스의 3분의 1밖에 지나지 않지만 이들 또한 이집트의 혈통과 연결되는 계보를 지니고 있다.

이제 스핑크스를 세운 목적이 좀더 알기 쉬워졌다.
이집트에 살던 아틀란티스 인들이 만든 스핑크스는 빛의 신인 태양에게 바친 신성한 건축물이라고 가설을 세워보자.
빛은 인간이 오감으로 느낄 수 있는 것 중에서 가장 미묘하고 만질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이 알고 있는 물질 중에서 가장 영묘한 종류의 것이며, 과학이 다룰 수 있는 가장 미묘한 원소이다. 창세기 속에서도 가장 먼저 창조된 것이 빛이었으며 그것이 없이는 다른 어떤 것도 창조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집트 식 교육을 받은 모세는, "하느님의 영이 깊은 궁창 위의 표면을 움직였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생겼다." 라고 썼다. 이는 이집트의 빛의 숭배에 대한 또 하나의 증거이기도 하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태양으로부터 빛이 생겨났다고 믿었다.
태양이 없으면 우리는 끔직한 암흑 속에 영원히 남겨 질 것이다. 이 태양에 대한, 그리고 그 사자(메신저)인 빛에 대한 숭배가 아틀란티스 종교의 중심교리 였으며 고대 이집트 종교의 중심교리였다. 라(Ra 또는 Re), 즉 태양신은 제1원자요, 아버지요, 다른 모든 신들의 창조자요, 만물의 창조자 이며, 스스로 빛을 내고, 스스로 존재하는 유일자였다.
만일 스핑크스가 이 빛의 종교와 관련된 것이라면 그것은 태양과도 분명히 어떤 관계를 지니고 있을 것이다.
스핑크스는 정확히 동쪽을 향해 태양이 떠오르는 지점을 응시하고 있다. 이집트 왕족들의 무덤이 죽어간 생명을 상징하기 위해 나일강 서안에 자리잡고 있는 것과 같이, 스핑크스는 다시 태어나는 생명을 상징하기 위해 동쪽을 향해 놓여있다.
700년 전만 해도 스핑크스는 아직 완전히 손상되지 않고 있어서 바그다드의 여행자 압둘 라티프는, "이 얼굴은 매우 아름답고 입에는 불가사의한 미소를 머금은 은총의 표정이 베어있다."고 쓰고 있다. 그는 서기 1200년 조금 전에 이집트 여행을 시작했으며 이집트에서 본 것 중에 무엇이 가장 훌륭했느냐는 물음에 스핑크스를 지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오늘 날에는 그와 같은 칭송은 들을 수가 없을 정도로 스핑크스의 얼굴은 망가져 있다.
코는 포격에 떨어져 나가고 꼬아 놓은 사각형 턱수염(대영박물관 소장)도 깨어지고 입술은 슬프게도 쪼아져 없어졌으며 왕의 상징인 코브라 역시 옆 부분이 눈에 띄게 손상되었다. 한 때 인자했던 입은 반쯤 비뚤어진 모습으로 슬픈 듯, 비웃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다.
이집트 인들은 나폴레옹 군인들이 대포를 쏘아 스핑크스의 코를 반이나 떨어져 나가게 했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프랑스의 고고학자들은 18세기의 이집트 기병대가 그것을 포술 훈련의 목표물로 삼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나폴레옹은 코르시카 섬 출신 포병 장교 출신이었지만, 그는 예술품을 너무도 사랑했고 유명한 고대 유물의 열렬한 찬양자였으며, 사려가 깊은 인물이었기에 사막에 외롭게 앉아 꿈을 꾸고 있는 이 석상의 귀중한 가치를 알지 못했을 리가 없다는 것이 주장의 근거였다.
이들의 주장이 그럴듯 한 것이, 다수가 무슬림인 이집트 기병대라면 우상을 증오하는 이슬람교도로서 양심의 가책을 훨씬 덜 느꼈을 것이다.
아랍의 한 역사가는," 1379년에는 어떤 광적인 "Sheikh"(이슬람교의 수장)가 알라신에 대한 열광의 표시로 스핑크스의 코를 잘라버리려고 했던 일이 있었다.'고 말한다.

지금도 스핑크스는 보이지 않게 파괴 되어 가고 있다.
그의 주변 수 미터까지 건물들이 들어서고 이 곳으로부터 스며드는 지하수에 의해 석회암으로 된 그의 몸체가 보이지 않게 녹아가고 있다.
최근에 이집트 정부는 이를 막기 위해 주변에 방수막을 설치하고 스핑크스를 비로 인한 파괴와 풍화작용으로 오는 피해를 막기 위해 몸 전체를 플라스틱으로 코팅할 것이라는 예기도 들린다.



**참고 문헌**
A Search in Ancient Egypt - Paul Brant,
Ancient Egypt - Lienel Casson
이야기 세계사 - 김 경묵, 우 종익 편저
이집트 자료실 - 대영 박물관
고대 이집트 문명의 이해 - 이집트 박물관
이집트 여행 - 크리스티앙 자크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Trackback 0 Comment 0

팜므파탈 '클레오파트라'(2)


사용자 삽입 이미지

클레오파트라의 초상

카이사르가 암살되자 다음 해 카이사르의 암살자들을 처벌한 로마 최고의 권력자인 안토니우스가 새로운 영웅으로 인기 급상승하게 되었다.
다시 한번 절망속에 빠져있던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를 보고 무언가 감이 왔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Marcus Antonius statue

이때 안토니우스는 자신이 묵고있던 터키의타르소스 마을로 클레오파트라를 부른다.
카이사르 복수전에서 자신들을 돕지않은 이유를 묻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을 기회라고 생각한 클레오파트라는 일부러 안토니우스를 오래 기다리게 해서 초조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호화로운 배를 타고 등장! 그를 선상의 연회에 초대했다.
진주를 식초에 타서 마시며 이집트의 재력을 과시하는 등 클레오파트라의 능숙한 접대에 단순하고 촌스러운 안토니우스는 세련된 클레오파트라의 행동에 깜짝 놀랐다. 딱딱하던 태도는 순식간에 부드러워 졌으며 간단하게 친해지게 되었다.
그 후 연인이 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어린애처럼 날마다 놀았다. (좋아하던 놀이 중 하나는 신분이 낮은 사람처럼 차리고 서민들의 마을을 함께 돌아다니는것)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에게 완전 반해서 그녀가 원하는것은 무엇이든 해주었다.
카이사르가 거부했던 아르시노에를 처형하기도...

사용자 삽입 이미지

Octavianus augustus

달콤한 생활을 계속하고 싶었지만 옥타비아누스(카이사르의 양자)와의 분쟁때문에 귀국해야만 했다.
안토니우스가 이집트에서 바람피는 동안 로마에 있던 본처 풀비아는 남편의 출세를 위협하는 옥타비아누스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는데 남편을 위한 그녀의 무모한 행동때문에 가련한 풀비아는 안토니우스에게 야단을 맞고 병사(病死) 하게 된다.
(열혈 여인 풀비아에 대한 일화 한가지더안토니를 아이취급하며 비난했던 키케로는 '공공연한 암살'을 당했는데 풀비아는 기뻐하며 그 시체의 혀에 핀을 꽂았다고 한다. 안토니의 취향은 강한 여성인듯...)
일단 안토니우스는는 옥타비아누스에게 사과를 하고 화해를 위해 그의 여동생 옥타비아와 결혼, 나름대로 부부사이가 좋아서 아이도 생겨났다.
그렇게 지낸지 3년의 세월이 흐르고....
그를 기다렸던 클레오파트라에게도 안토니우스와의 사이에서 생긴 쌍둥이(셀레네, 헬리오스)가 있었다.
안토니우스는 파르티아 원정을 위해 안티오키아로 갔는데 거기서 드디어 클레오파트라를 부르게 되고 다시 그녀와 달콤한 나날을 보낸다.
늘 눈앞의 쾌락에 약한 남자이자 정말로 제멋대로인 안토니우스....
이번에는 클레오파트라에게 상당한 성의를 보였다. 클레오파트라와 정식으로 결혼을 맹세하고 쌍둥이를 받아들이며 땅도 선물했다. 현재 터키의 벨가몬 도서관에서 20만권의 책도 가지고 왔다.
하지만 파르티아 원정에서 완전 실패한 안토니우스는 전쟁에서 그를 배반한 아르메니아를 토벌하고 조금의 힘을 얻게된다.
일단 로마로 돌아갈까 망설이다 이집트로 귀국!
클레오파트라가 낳은 아이들에게 영토를 나눠줄것을 공언하고 자신이 죽으면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알렉산드리아에 묻어달라는 유언장을 만들었다.
자존심세고 질투도 많은 로마인들이 이 소식을 듣자 화가 치솟았다. '이집트 여자에게 넘어간 바보같은 남자'라며 상대도 하지 않았다.
옥타비아누스는 이러한 여론을 감지하고 '로마에게 불이익을 초래한 안토니우스를 처벌해야 한다'고 선전포고를 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 유명한 악티움 해전이 발발!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가 치열하게 교전을 하던 중 안토니우스의 군대는 옥타비아누스의 함대에 봉쇄되어 꼼짝 못하는 상황에 빠지게 된다. 안토니우스는 봉쇄를 뚫기위해 발포를 시작하고 그때 클레오파트라가 이끄는 60척의 함대가 갑자기 퇴각하자 안토니우스가 탄 배도 그녀의 배를 뒤쫓았다.
남겨진 함대는 지휘관 없이 싸우다 결국 완패하고 만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클레오파트라가 퇴각한 이유는?
'싸움을 못하는 안토니우스를 포기한것', '원래 도주할 예정이었고 퇴로를 열기 위한 행동' 등등 로마에서는 안토니우스가 군대를 저버리고 여자를 쫓아갔다고 악평이 난무했다.
한편 클레오파트라는 인도로 가서 새로운 제국을 건설하고자 했지만 영토를 빼앗긴 나바테아 왕국의 군대가 그녀의 마지막 희망이 걸린 함대를 불태운다.
체념한 클레오파트라는 카에사리온만 배에 태워 인도로 보냈다.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를 넘겨주면 목숨은 살려주겠다'며 협상을 요구했지만 그녀는 응하지 않았다.
마침내 옥타비아누스의 군대가 알렉산드리아로 쳐들어왔다. 안토니우스는 남자답게 결투하자고 했지만 간단하게 거절당한다. 적의 공격에 부상을 당한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의 품에서 죽고 싶다는 일념으로 왕궁으로 뛰어들어갔다.
그러나 여왕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스스로를 칼로 찔러 자결하고 만다.
하지만 살아있던 클레오파트라.... 안토니우스를 발견해서 방으로 옮겨왔다.
이후 왕궁에 온 옥타비아누스는 클레오파트라를 로마에서 끌고 다니며 모욕을 줄 계획이어서 자살하지 못하게 엄중히 지키게 했다.
그러나 이집트산 코브라를 이용해 자살한 클레오파트라...
온갖 재능을 발휘해 시대에 도전한 클레오파트라의 생애는 이렇게 끝나고 만다.
동시에 이집트 제국의 역사도 끝이나게 되었다.

클레오파트라의 이야기는 플루타르코스가 자세히 기록했다.
알렉산드리아는 그 후 계속되는 지진과 해일때문에 지반이 침몰한다.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프톨레마이오스 왕가의 무덤과 왕궁 등은 모두 바다 밑에 있을것이다.
그 후 클레오파트라의 자녀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인도로 가던 카에사리온은 욕심 많은 보호자에게 속아 옥타비아누스에게 가서 처형당했다. 안토니우스의 아이들인 쌍둥이와 또 한명의 아들은 안토니우스의 아내가 맡았다.
쌍둥이 중 딸인 클레오파트라 셀레네는 프톨레마이오스를 낳았다.
하지만 그가 칼리굴라 황제에게 살해되면서 프톨레마이오스의 혈통도 끊기게 된다.
아들 두명의 이후 행적은 알 수 없다.
그 후의 이집트는 300년동안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대신 로마 황제 옥타비아누스가 이집트를 통치했다. 로마의 속국인 이집트는 마치 옥타비아누스의 땅이나 식량창고같이 되어버렸다. 그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는 달리 이집트인을 전혀 배려하지 않고 종교와 문화도 무시했다.
이집트의 문화를 좋아하는 로마황제도 있었지만 이집트의 국민들은 점점 힘들어졌다.
7세기에 이슬람군이 들어왔고, 그들의 지배를 받았으며... 1952년에 이집트가 독립을 쟁취하게 되었다.

자료 출처 : 엔조이이집트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Trackback 0 Comment 0

팜므파탈 '클레오파트라'(1)


사용자 삽입 이미지

클레오파트라의 초상화

이집트의 파라오이자 아름다움의 대명사 팜므파탈 '클레오파트라'
클레오파트라의 파란만장한 생애와 러브스토리는 많은 예술가들의 영감을 자극하여 창작의 원천이 되기도 하였다.
"그녀의 코가 1인치만 낮았더라도 세계의 역사가 바뀌었을것" 이라는 말이 나올정도로 클레오파트라는 자타가 공인하는 용모와 자태를 지닌 미인의 대명사로 알려져있었다.
그러나 플루타르코스는 '그녀의 외모는 평범하지만 줄이 많이 달린 현악기가 울리는듯한 아름다운 음색을 가졌다' 고 말했다.
음색이 아름다움을 훨씬 돋보이게 하기 때문일까? 정말이지 목소리는 중요한것 같다.
이런 타고난 목소리를 가진 클레오파트라의 매력에 빠진 영웅이 이제 등장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Julius Caesar

그의 이름은 로마의 율리우스 카이사르.
폼페이우스를 쫓아 이집트에 온 카이사르는 어이없게도 이집트의 단순한 세남자(아킬라스, 포티누스, 테오도투스)에 의해 폼페이우스가 죽게되자 자신이 죽이지 못한것에 대해 완전히 기분을 망쳤다.
그당시 클레오파트라는 남편 프톨레마이오스 14세와의 권력투쟁에서 패배한 후 강제로 패위되어 유배된 상태였다. 막다른 골목에 선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르는 내 운명의 열쇠를 쥔 남자'라고 판단하고 그 유명한 행동을 한다. 양탄자를 자신의 몸에 둘둘 말아 선물포장처럼 감싸고 충복을 시켜 카이사르에게 선물을 가져왔다며 둘러댄다. 큼직한 양탄자는 카이사르의 호기심을 끌었고 그는 서둘러 양탄자를 풀게 했다.
그런데 이게 왠일? 양탄자를 펼치자 반라의 아름다운 클레오파트라가 나타나는것이 아닌가... 인기좋은 카이사르도 이런 대담한 여자를 보고 좋아할 수밖에...ㅋㅋ
둘은 밤새도록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아마도 그녀의 아름답고 매력적인 목소리에 흠뻑 빠져서 그런것인지도...
그리고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르와 대화할때 따로 통역이 필요 없었다.
클레오파트라가 어학에 있어서 상당한 재능이 있었다고 하는데 프톨레마이오스가에서 유일하게 이집트어를 할 줄 알았고 지중해지역 각국의 언어에도 능통했다.
또한 역사와 문학에도 정통했기 때문에 어떤 주제도 문제 없었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기술이 아주 뛰어났다.
클레오파트라의 총명함과 매력에 완전히 빠져들은 카이사르는 그녀와 연인이 된것은 물론이고 그녀의 정치적 후원자가 되어 주었다.
이에 클레오파트라는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형식적인 혼인을 하여 함께 이집트를 통치하게 되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Cleopatra & Caesar


카이사르는 10년전 이집트에게 빼앗은 키프로스를 돌려주는 너그러움을 보이고 여동생 아르시노에와 어린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4세에게도 잘보이려 노력했다.
하지만 눈엣가시같은 그녀의 형제자매들은 로마가 모든것을 결정하는것도, 로마군이 계속 이집트에 있는것도 싫어했다. 프톨레마이오스 13세 일당중 포티누스는 로마군에게 곰팡이가 핀 음식을 주는가하면 금, 은으로 된 식기를 감추고 볼품없는 나무나 흙으로 만든 식기를 사용(좋은건 로마군이 빼앗아간것처럼) 이런 치졸한 짓을 일삼다가 결국 처형당한다.
이로인해 왕궁의 사람들도 로마군을 좋아하지 않게 되고 마침내 군사령관 아킬라스는 시민까지 끌여들여 로마군과 전면전을 펼치게 된다.
이때 카이사르는 알렉산드리아의 항구에 있던 군함 72척에 불을 질렀고 4개월간의 전쟁은 카이사르의 승리로 끝나게 되었다.
아킬라스는 내부 다툼와중에 살해되었고 프톨레마이오스 13세는 익사하였다.
한편 여동생 아르시노에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르에게 아르시노에를 죽여달라고 부탁했지만 이집트에서 추방하는것으로 끝냈다.(아르시노에는 에페소스로 도망갔다)
방해꾼이 없어진 클레오파트라는 프톨레마이오스 14세와 형식적인 결혼을 해서 공동통치를 하는척 했지만 실권은 완전히 장악해버렸다.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르의 아이도 가졌는데 이때가 두사람에게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로마에 본처가 있었다)
바쁜 카이사르는 로마로 돌아갔고 클레오파트라는 계속 그를 기다렸지만 전혀 연락이 없었다. 기다리다 지친 클레오파트라는 로마로 향하게 되고 카이사르는 사랑이 예전같지는 않았지만 어른스럽게 환영의 뜻을 표했다. 만나고나니 다시 예전처럼 뜨거운 사랑이 되살아났는지 두사람은 보란듯이 로마의 거리를 화려하게 돌아다녔다.
클레오파트라는 기다리다 쌓인 울분을 해소하려는듯 이것저것을 요구했는데 카이사르는 시내에 그녀의 황금상을 세워 클레오파트라를 기쁘게 해주려 했다. 하지만 그것이 로마 시민들을 화나게 했다.
로마 시민들은 "우리의 영웅이 미개한 나라의 여자에게 휘둘리고 있다"고 여기고 클레오파트라는 로마 시민의 적이 되고 말았다.
그러던 중 카이사르의 무한한 권력에 위협을 느낀 정적(부루투스)들이 카이사르를 암살하고 말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Temple of Julius Caesar

카이사르가 암살되자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로 도망을 가게된다.
귀국 후 프톨레마이오스 14세가 죽고(클레오파트라가 독살했다는 설도 있다) 카이사르와의 사이에서 낳은 카에사리온이 프톨레마이오스 15세가 되었다.

자료 출처 : 엔조이이집트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Trackback 1 Comment 0

이집트문명 - 투탕카멘의 관을 연 고고학자 하워드 카터(2)


사용자 삽입 이미지

Egyptian Museum

투탕카멘 무덤 발굴의 주역이 또 한사람이 있는데 영국 귀족 카나본 경이다.
그는 젊었을때부터 부모돈으로 방탕한 생활을 하며 늘 새로운 자극을 추구하며 살아온 인물이었다.
인생을 브레이크 없이 즐기다가 교통사고로 중상을 입고 일단 정지....
그 상처의 후유증으로 몸을 쓸수 없게되어 요양차 이집트에 오게되고 관광을 하는동안 카나본 경은 완전히 이집트에 빠져들게 된다.카나본경은 발굴에 관심을 갖게되면서 고고국 장관이던 마스페로의 소개로 카터의 후원자가 되어준다.
하지만 발굴지점 최고인기인 왕들의 계곡은 데이비스가 혈안이 되어 작업하고 있어서 발굴권을 내놓지 않는다.
카터는 하는수없이 왕들의 계곡 주변을 파기로 하고.....
드라 아부 알 나가에서 아멘호테프 1세의 무덤을 발견!
쿨나에서 제18왕조 초기의 왕자인 테타 키의 무덤을 발견!
다이르 알 바리에 있는 멘투호테프 장제전 정원에서 그가 타고 있던 말이 구멍에 걸려 넘어지는 바람에 땅에 떨어졌는데 그곳을 파자 지하실로 통하는 통로가 나오고 거기서 멘투호테프 2세의 좌상을 발견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멘투호테프 2세의 좌상

사용자 삽입 이미지

아멘호테프 1세

한편 왕들의 계곡에 있던 시어도어 데이비스는 카터의 후임이었던 키벨을 후원하며 눈부신 성과를 내고 있었는데 유야와 투야의 무덤등을 발견 최초로 거의 도굴되지 않은 무덤을 발견했다.
카터와 키벨의 뒤를 이어서 데이비스와 함께 한 에어튼은 지금은 완전히 사라진 시리아의 오스트라콘을 발견!
제 19왕조의 파라오 시프타의 무덤을 발견!
계속해서 원숭이와 개, 집오리의 무덤도 발견!(아멘호테프 2세의 애완동물 무덤으로 추정)
무덤 KV55와 제 18왕조의 파라오 호렘헤브의 무덤을 발견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호렘헤브의 무덤 벽화

하지만 데이비스는 그들의 발견으로 높아진 명성에도 불구하고 항상 불만이 많아져서 에어튼마져도 떠나갔다.

그후에 데이비스가 죽고나서 마침내 간신히 카터에게 왕들의 계곡 발굴권이 넘어오게 되었다.힘겹게 발굴권을 얻긴 했지만 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어 카나본은 할수없이 귀국을 하게 되고 카터는 운좋게도 전령의 임무를 맡게 되어 이집트에 남을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나면서 본격적으로 발굴이 가능해졌는데 카터 일행은 왕들의 계곡 발굴에 5년이나 투자했지만(카나본경과 시작한건 총 15년) 대발견이라고 할 만한 것은 없었다.
게다가 카나본 경이 외환거래에 실패해서 자금의 여유가 없어진 나머지 카터에게 발굴 중지를 요구하게 된다.
이에 카터는 딱 한 계절만 발굴을 더 해줄것을 끈질기게 요구한 끝에 카나본 경의 의지를 꺾고 한계절 더 발굴을 연장하게 된다.
단 이것이 마지막 기회로 왕묘를 발굴하지 못하면 발굴권은 반환하기로 했다.
최후의 기로에 선 카터는 람세스 6세의 무덤 발굴 때 만든 인부들의 작은 오두막이 있던 곳을 선택하고 그간의 왕들의 계곡 발굴 기록들을 상세하게 조사하고 순서있게 발굴을 계속하면서 람세스 2세메렌프타의 항아리가 13개 수납되어 있던 창고등을 발견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람세스 2세의 석상

그리고 마침내 거의 포기직전인 1922년 11월 4일 투탕카멘의 왕의 무덤을 발굴했다.
계곡 밑에선 밀폐된 무덤의 출입구로 이어지는 바위 층계를 발견한 것이다.
카터는 매장실 주위의 한 밀폐된 방에서 파라오의 미라를 발견했는데 세개의 외부 관 안에 매장된 이후 누구의 손도 닿지 않은 순금으로 만든 내부 관이 있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진에서 카터는 가장 안쪽 관에 부은 굳은 송진을 조심스럽게 벗겨내고 있다.
미라의 팔은 갈고리 모양의 왕홀과 회초리를 쥔 채 십자로 엇갈려있고 황금 데스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파이앙스 도자기, 유리, 홍옥수, 청금석 등으로 세공된 마스크에는 석영과 흑요석으로 만든 살아있는 듯한 눈동자가 박혀 있었다.
이 화려한 마스크 뒷면에는 <사자의 서>의 본문이 새겨져 있다.

투탕카멘 왕묘를 발굴할 때는 많은 에피소드가 있었는데 카터가 키우던 애완새 카나리아가 코브라에게 먹히자 발굴 인부들은 발굴작업에 불길한 징조라고 두려워 하였다.
코브라는 이집트 왕의 머리를 장식하는 동물이었기 때문이다.
발굴이 진행되던 1923년 카나본 경이 사망하자 투탕카멘왕의 저주를 받아 사망하였다는 소문이 퍼졌다.
그 후 6년에 걸쳐 발굴작업이 계속진행되었고 이집트학에 풍부하고 중대한 공헌을 하였다. 투탕카멘의 눈부시게 아름다운 보물들을 원래 모습 그대로 볼 수 있는것은 카터가 발견했기 때문이다.
카터는 투탕카멘왕묘의 발굴을 마지막으로 더이상 발굴작업을 하지 않았으며 1932년 영국으로 돌아갔다.영국에 돌아가서도 강연등으로 하루하루 생계를 유지했으며 결혼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1939년 65세의 나이로 런던에서 임종을 맞이했다.
'학문적인 연구가 끝나면 파라오는 그의 묘로 돌아가기를 바란다' 는 카터의 희망대로 투탕카멘은 현재 자신의 묘에서 관광객에게 전시되고 있다.


자료 출처 : 엔조이이집트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Trackback 0 Comment 0

이집트문명 - 투탕카멘의 관을 연 고고학자 하워드 카터(1)


사용자 삽입 이미지
하워드 카터는 1873년 영국 노폭 주 캔딩턴이라는 마을에서 아홉 형제중 막내로 태어났다. 소년 시절 가난 때문에 학교를 다지니 못한 그는 동물화가였던 부친에게서 초보적인 교육을 받고 수채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재주덕분에 히에로글리프(상형문자)를 묘사하는데 최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이집트 조사대의 대원으로 발탁되어 이때부터 그의 이집트 인생이 시작된다.
1891년부터 8년간 베니하산과 아마르나 등으로 유명한 고고학자 페트리를 비롯한 탁월한 고고학자들 밑에서 충실히 임무를 수행하다 이집트의 고고청 장관이던 마스페로의 눈에 띄어 1899년에는 이집트 누비아 지역의 인스펙터(우적 감사관)에 임명되었다.
관광 차 이집트에 왔다가 진심으로 매료된 미국의 갑부 시어도어 데이비스를 만나게되고 그는 '왕들의 계곡'을 깊이 발굴해보자고 제안하게 된다(발굴에는 자금이 많이 들기때문에 후원자가 필요하다)

데이비스는 명성을 높이기위해 후원을 약속하고 카터는 그의 지원속에서 투트모세
4세의 무덤
을 발견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투트모세 4세의 무덤


발견은 했지만 너무 번거로보여 아무도 손을 대지 않은 채 황폐해져 있던 무덤 KV20.
이것을 일년에 걸쳐 파내려가서 마침내 현실에 도착해 하트셉스트 여왕의 무덤임을 밝혀냈다. 고고국은 왕묘내에 전기를 끌어들여 조명을 밝혀서 관광객이 즐길수 있도록 했다. 예전에 발견된 세티 2세나 메렌프타의 무덤을 청소하다가 하트셉스트의 유모 무덤을 발견하기도 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Queen Hatshepsut's Temple


1904년 카터는 하이집트 지역의 인스펙터로 승진하여 룩소르에서 카이로로 전근을 가게되었다. 그리고 그 직후 일이 생기고 말았는데 카터가 사카라의 계단식 피라미드로 사찰을 나갔을 때였다.
그 곳에는 여러 명의 프랑스인 남녀가 와인을 마시며 소란을 피우고 있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이집트 법률에는 유적 안에서 뭘 먹는다든지 소란을 피운다든지 하면 안되게 되어 있었다.
카터는 당장 “멈추시오”하고 주의를 주었다. 그러나 프랑스인들은 말을 듣지 않았다.
몇 번이나 주의를 주는 사이 입씨름이 벌어졌고, 그들 중 한 명이 “너무 건방지게 굴면 당신 해고시킬거야. 내 숙부가 높은 자리에 있어.” 하고 협박을 해왔다.
카터는 화가 치밀었다. “보자 보자 하니 정말 심하군. 어디 해고할 수 있으면 해고해보시지”
그런데 이 와중에서 카터를 지켜주려던 수위가 그 프랑스인을 때려 눕혀 경찰서에 갇히고 말았다. 더구나 그 프랑스인의 숙부인지 진짜 고위 공무원이었으니 세상 일이란 정말 알 수 없는 것이다.
결국 사건은 두 나라 사이의 국제문제로 비화되었고 그 프랑스인들은 영사관을 통해서 카터에게 사과를 요구해왔다. 그러나 카터는 응하지 않고 결국 해고당하고 말았다
대쪽같은 성격으로 인해 고난의 길을 걷는 그는 직장은 잃었지만 이집트를 떠나고 싶지 않아서수채화가로 일하며 조촐하게 살았다.
천직이라고 여길정도로 좋아하는 직업을 잃는다고 해도 자신의 양심에 위배되는 일은 하지않는 강철같은 의지를 보여주는 좋은 일화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투트모세 4세 무덤벽화

사용자 삽입 이미지

투트모세 4세 무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하트셉수트



자료 출처 : 엔조이이집트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Trackback 0 Comment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