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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04/11 팜므파탈 '클레오파트라'(2)
- 2008/04/11 팜므파탈 '클레오파트라'(1)
- 2008/04/10 이집트문명 - 투탕카멘의 관을 연 고고학자 하워드 카터(2)
- 2008/04/10 이집트문명 - 투탕카멘의 관을 연 고고학자 하워드 카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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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깊은 역사가들이 알고 있는 한 대피라미드 안에서는 어떠한 미라(시체)도, 황금관도, 장례도구도 발견된 바가 없다. ![]()
오늘날 우리가 바라보는 피라미드는 고대인들이 보았던 그 피라미드가 아니다. ![]() Artists impression of the main pyramid complex ![]() Ground Plan of the Great Pyramid Complex of Khufu
**참고 문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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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피라미드들은 왕을 위한 거대한 무덤들이었다. ![]() ![]() 나폴레옹이 이집트를 정복할 때 데리고 간 과학자와 전문가들에게 이집트 국토조사를 위임했을 때 그들은 대(大)피라미드를 중심으로 삼아 거기서부터 경도를 재었다. ![]() 한편 색다른 이론가들이 있다. 그들은 이렇게 주장한다. **참고 문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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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틀란티스 대륙... ![]() 스핑크스가 잊혀진 세계, 미지의 아틀란티스 인들이 조각했을 것이라는 생각은 엄청나고 놀라운 발상이었다. ![]() 이제 스핑크스를 세운 목적이 좀더 알기 쉬워졌다.
![]() **참고 문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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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번 절망속에 빠져있던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를 보고 무언가 감이 왔다.
이때 안토니우스는 자신이 묵고있던 터키의타르소스 마을로 클레오파트라를 부른다.
카이사르 복수전에서 자신들을 돕지않은 이유를 묻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을 기회라고 생각한 클레오파트라는 일부러 안토니우스를 오래 기다리게 해서 초조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호화로운 배를 타고 등장! 그를 선상의 연회에 초대했다.
진주를 식초에 타서 마시며 이집트의 재력을 과시하는 등 클레오파트라의 능숙한 접대에 단순하고 촌스러운 안토니우스는 세련된 클레오파트라의 행동에 깜짝 놀랐다. 딱딱하던 태도는 순식간에 부드러워 졌으며 간단하게 친해지게 되었다.
그 후 연인이 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어린애처럼 날마다 놀았다. (좋아하던 놀이 중 하나는 신분이 낮은 사람처럼 차리고 서민들의 마을을 함께 돌아다니는것)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에게 완전 반해서 그녀가 원하는것은 무엇이든 해주었다.
카이사르가 거부했던 아르시노에를 처형하기도...
달콤한 생활을 계속하고 싶었지만 옥타비아누스(카이사르의 양자)와의 분쟁때문에 귀국해야만 했다.
안토니우스가 이집트에서 바람피는 동안 로마에 있던 본처 풀비아는 남편의 출세를 위협하는 옥타비아누스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는데 남편을 위한 그녀의 무모한 행동때문에 가련한 풀비아는 안토니우스에게 야단을 맞고 병사(病死) 하게 된다.
(열혈 여인 풀비아에 대한 일화 한가지더안토니를 아이취급하며 비난했던 키케로는 '공공연한 암살'을 당했는데 풀비아는 기뻐하며 그 시체의 혀에 핀을 꽂았다고 한다. 안토니의 취향은 강한 여성인듯...)
일단 안토니우스는는 옥타비아누스에게 사과를 하고 화해를 위해 그의 여동생 옥타비아와 결혼, 나름대로 부부사이가 좋아서 아이도 생겨났다.
그렇게 지낸지 3년의 세월이 흐르고....
그를 기다렸던 클레오파트라에게도 안토니우스와의 사이에서 생긴 쌍둥이(셀레네, 헬리오스)가 있었다.
안토니우스는 파르티아 원정을 위해 안티오키아로 갔는데 거기서 드디어 클레오파트라를 부르게 되고 다시 그녀와 달콤한 나날을 보낸다.
늘 눈앞의 쾌락에 약한 남자이자 정말로 제멋대로인 안토니우스....
이번에는 클레오파트라에게 상당한 성의를 보였다. 클레오파트라와 정식으로 결혼을 맹세하고 쌍둥이를 받아들이며 땅도 선물했다. 현재 터키의 벨가몬 도서관에서 20만권의 책도 가지고 왔다.
하지만 파르티아 원정에서 완전 실패한 안토니우스는 전쟁에서 그를 배반한 아르메니아를 토벌하고 조금의 힘을 얻게된다.
일단 로마로 돌아갈까 망설이다 이집트로 귀국!
클레오파트라가 낳은 아이들에게 영토를 나눠줄것을 공언하고 자신이 죽으면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알렉산드리아에 묻어달라는 유언장을 만들었다.
자존심세고 질투도 많은 로마인들이 이 소식을 듣자 화가 치솟았다. '이집트 여자에게 넘어간 바보같은 남자'라며 상대도 하지 않았다.
옥타비아누스는 이러한 여론을 감지하고 '로마에게 불이익을 초래한 안토니우스를 처벌해야 한다'고 선전포고를 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 유명한 악티움 해전이 발발!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가 치열하게 교전을 하던 중 안토니우스의 군대는 옥타비아누스의 함대에 봉쇄되어 꼼짝 못하는 상황에 빠지게 된다. 안토니우스는 봉쇄를 뚫기위해 발포를 시작하고 그때 클레오파트라가 이끄는 60척의 함대가 갑자기 퇴각하자 안토니우스가 탄 배도 그녀의 배를 뒤쫓았다.
남겨진 함대는 지휘관 없이 싸우다 결국 완패하고 만다.
클레오파트라가 퇴각한 이유는?
'싸움을 못하는 안토니우스를 포기한것', '원래 도주할 예정이었고 퇴로를 열기 위한 행동' 등등 로마에서는 안토니우스가 군대를 저버리고 여자를 쫓아갔다고 악평이 난무했다.
한편 클레오파트라는 인도로 가서 새로운 제국을 건설하고자 했지만 영토를 빼앗긴 나바테아 왕국의 군대가 그녀의 마지막 희망이 걸린 함대를 불태운다.
체념한 클레오파트라는 카에사리온만 배에 태워 인도로 보냈다.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를 넘겨주면 목숨은 살려주겠다'며 협상을 요구했지만 그녀는 응하지 않았다.
마침내 옥타비아누스의 군대가 알렉산드리아로 쳐들어왔다. 안토니우스는 남자답게 결투하자고 했지만 간단하게 거절당한다. 적의 공격에 부상을 당한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의 품에서 죽고 싶다는 일념으로 왕궁으로 뛰어들어갔다.
그러나 여왕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스스로를 칼로 찔러 자결하고 만다.
하지만 살아있던 클레오파트라.... 안토니우스를 발견해서 방으로 옮겨왔다.
이후 왕궁에 온 옥타비아누스는 클레오파트라를 로마에서 끌고 다니며 모욕을 줄 계획이어서 자살하지 못하게 엄중히 지키게 했다.
그러나 이집트산 코브라를 이용해 자살한 클레오파트라...
온갖 재능을 발휘해 시대에 도전한 클레오파트라의 생애는 이렇게 끝나고 만다.
동시에 이집트 제국의 역사도 끝이나게 되었다.
클레오파트라의 이야기는 플루타르코스가 자세히 기록했다.
알렉산드리아는 그 후 계속되는 지진과 해일때문에 지반이 침몰한다.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프톨레마이오스 왕가의 무덤과 왕궁 등은 모두 바다 밑에 있을것이다.
그 후 클레오파트라의 자녀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인도로 가던 카에사리온은 욕심 많은 보호자에게 속아 옥타비아누스에게 가서 처형당했다. 안토니우스의 아이들인 쌍둥이와 또 한명의 아들은 안토니우스의 아내가 맡았다.
쌍둥이 중 딸인 클레오파트라 셀레네는 프톨레마이오스를 낳았다.
하지만 그가 칼리굴라 황제에게 살해되면서 프톨레마이오스의 혈통도 끊기게 된다.
아들 두명의 이후 행적은 알 수 없다.
그 후의 이집트는 300년동안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대신 로마 황제 옥타비아누스가 이집트를 통치했다. 로마의 속국인 이집트는 마치 옥타비아누스의 땅이나 식량창고같이 되어버렸다. 그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는 달리 이집트인을 전혀 배려하지 않고 종교와 문화도 무시했다.
이집트의 문화를 좋아하는 로마황제도 있었지만 이집트의 국민들은 점점 힘들어졌다.
7세기에 이슬람군이 들어왔고, 그들의 지배를 받았으며... 1952년에 이집트가 독립을 쟁취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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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의 파라오이자 아름다움의 대명사 팜므파탈 '클레오파트라'
클레오파트라의 파란만장한 생애와 러브스토리는 많은 예술가들의 영감을 자극하여 창작의 원천이 되기도 하였다.
"그녀의 코가 1인치만 낮았더라도 세계의 역사가 바뀌었을것" 이라는 말이 나올정도로 클레오파트라는 자타가 공인하는 용모와 자태를 지닌 미인의 대명사로 알려져있었다.
그러나 플루타르코스는 '그녀의 외모는 평범하지만 줄이 많이 달린 현악기가 울리는듯한 아름다운 음색을 가졌다' 고 말했다.
음색이 아름다움을 훨씬 돋보이게 하기 때문일까? 정말이지 목소리는 중요한것 같다.
이런 타고난 목소리를 가진 클레오파트라의 매력에 빠진 영웅이 이제 등장한다.
폼페이우스를 쫓아 이집트에 온 카이사르는 어이없게도 이집트의 단순한 세남자(아킬라스, 포티누스, 테오도투스)에 의해 폼페이우스가 죽게되자 자신이 죽이지 못한것에 대해 완전히 기분을 망쳤다.
그당시 클레오파트라는 남편 프톨레마이오스 14세와의 권력투쟁에서 패배한 후 강제로 패위되어 유배된 상태였다. 막다른 골목에 선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르는 내 운명의 열쇠를 쥔 남자'라고 판단하고 그 유명한 행동을 한다. 양탄자를 자신의 몸에 둘둘 말아 선물포장처럼 감싸고 충복을 시켜 카이사르에게 선물을 가져왔다며 둘러댄다. 큼직한 양탄자는 카이사르의 호기심을 끌었고 그는 서둘러 양탄자를 풀게 했다.
그런데 이게 왠일? 양탄자를 펼치자 반라의 아름다운 클레오파트라가 나타나는것이 아닌가... 인기좋은 카이사르도 이런 대담한 여자를 보고 좋아할 수밖에...ㅋㅋ
둘은 밤새도록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아마도 그녀의 아름답고 매력적인 목소리에 흠뻑 빠져서 그런것인지도...
그리고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르와 대화할때 따로 통역이 필요 없었다.
클레오파트라가 어학에 있어서 상당한 재능이 있었다고 하는데 프톨레마이오스가에서 유일하게 이집트어를 할 줄 알았고 지중해지역 각국의 언어에도 능통했다.
또한 역사와 문학에도 정통했기 때문에 어떤 주제도 문제 없었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기술이 아주 뛰어났다.
클레오파트라의 총명함과 매력에 완전히 빠져들은 카이사르는 그녀와 연인이 된것은 물론이고 그녀의 정치적 후원자가 되어 주었다.
이에 클레오파트라는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형식적인 혼인을 하여 함께 이집트를 통치하게 되었다.
카이사르는 10년전 이집트에게 빼앗은 키프로스를 돌려주는 너그러움을 보이고 여동생 아르시노에와 어린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4세에게도 잘보이려 노력했다.
하지만 눈엣가시같은 그녀의 형제자매들은 로마가 모든것을 결정하는것도, 로마군이 계속 이집트에 있는것도 싫어했다. 프톨레마이오스 13세 일당중 포티누스는 로마군에게 곰팡이가 핀 음식을 주는가하면 금, 은으로 된 식기를 감추고 볼품없는 나무나 흙으로 만든 식기를 사용(좋은건 로마군이 빼앗아간것처럼) 이런 치졸한 짓을 일삼다가 결국 처형당한다.
이로인해 왕궁의 사람들도 로마군을 좋아하지 않게 되고 마침내 군사령관 아킬라스는 시민까지 끌여들여 로마군과 전면전을 펼치게 된다.
이때 카이사르는 알렉산드리아의 항구에 있던 군함 72척에 불을 질렀고 4개월간의 전쟁은 카이사르의 승리로 끝나게 되었다.
아킬라스는 내부 다툼와중에 살해되었고 프톨레마이오스 13세는 익사하였다.
한편 여동생 아르시노에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르에게 아르시노에를 죽여달라고 부탁했지만 이집트에서 추방하는것으로 끝냈다.(아르시노에는 에페소스로 도망갔다)
방해꾼이 없어진 클레오파트라는 프톨레마이오스 14세와 형식적인 결혼을 해서 공동통치를 하는척 했지만 실권은 완전히 장악해버렸다.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르의 아이도 가졌는데 이때가 두사람에게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로마에 본처가 있었다)
바쁜 카이사르는 로마로 돌아갔고 클레오파트라는 계속 그를 기다렸지만 전혀 연락이 없었다. 기다리다 지친 클레오파트라는 로마로 향하게 되고 카이사르는 사랑이 예전같지는 않았지만 어른스럽게 환영의 뜻을 표했다. 만나고나니 다시 예전처럼 뜨거운 사랑이 되살아났는지 두사람은 보란듯이 로마의 거리를 화려하게 돌아다녔다.
클레오파트라는 기다리다 쌓인 울분을 해소하려는듯 이것저것을 요구했는데 카이사르는 시내에 그녀의 황금상을 세워 클레오파트라를 기쁘게 해주려 했다. 하지만 그것이 로마 시민들을 화나게 했다.
로마 시민들은 "우리의 영웅이 미개한 나라의 여자에게 휘둘리고 있다"고 여기고 클레오파트라는 로마 시민의 적이 되고 말았다.
그러던 중 카이사르의 무한한 권력에 위협을 느낀 정적(부루투스)들이 카이사르를 암살하고 말았다.
카이사르가 암살되자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로 도망을 가게된다.
귀국 후 프톨레마이오스 14세가 죽고(클레오파트라가 독살했다는 설도 있다) 카이사르와의 사이에서 낳은 카에사리온이 프톨레마이오스 15세가 되었다.
자료 출처 : 엔조이이집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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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탕카멘 무덤 발굴의 주역이 또 한사람이 있는데 영국 귀족 카나본 경이다.
그는 젊었을때부터 부모돈으로 방탕한 생활을 하며 늘 새로운 자극을 추구하며 살아온 인물이었다.
인생을 브레이크 없이 즐기다가 교통사고로 중상을 입고 일단 정지....
그 상처의 후유증으로 몸을 쓸수 없게되어 요양차 이집트에 오게되고 관광을 하는동안 카나본 경은 완전히 이집트에 빠져들게 된다.카나본경은 발굴에 관심을 갖게되면서 고고국 장관이던 마스페로의 소개로 카터의 후원자가 되어준다.
하지만 발굴지점 최고인기인 왕들의 계곡은 데이비스가 혈안이 되어 작업하고 있어서 발굴권을 내놓지 않는다.
카터는 하는수없이 왕들의 계곡 주변을 파기로 하고.....
드라 아부 알 나가에서 아멘호테프 1세의 무덤을 발견!
쿨나에서 제18왕조 초기의 왕자인 테타 키의 무덤을 발견!
다이르 알 바리에 있는 멘투호테프 장제전 정원에서 그가 타고 있던 말이 구멍에 걸려 넘어지는 바람에 땅에 떨어졌는데 그곳을 파자 지하실로 통하는 통로가 나오고 거기서 멘투호테프 2세의 좌상을 발견했다.
한편 왕들의 계곡에 있던 시어도어 데이비스는 카터의 후임이었던 키벨을 후원하며 눈부신 성과를 내고 있었는데 유야와 투야의 무덤등을 발견 최초로 거의 도굴되지 않은 무덤을 발견했다.
카터와 키벨의 뒤를 이어서 데이비스와 함께 한 에어튼은 지금은 완전히 사라진 시리아의 오스트라콘을 발견!
제 19왕조의 파라오 시프타의 무덤을 발견!
계속해서 원숭이와 개, 집오리의 무덤도 발견!(아멘호테프 2세의 애완동물 무덤으로 추정)
무덤 KV55와 제 18왕조의 파라오 호렘헤브의 무덤을 발견했다.
그후에 데이비스가 죽고나서 마침내 간신히 카터에게 왕들의 계곡 발굴권이 넘어오게 되었다.힘겹게 발굴권을 얻긴 했지만 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어 카나본은 할수없이 귀국을 하게 되고 카터는 운좋게도 전령의 임무를 맡게 되어 이집트에 남을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나면서 본격적으로 발굴이 가능해졌는데 카터 일행은 왕들의 계곡 발굴에 5년이나 투자했지만(카나본경과 시작한건 총 15년) 대발견이라고 할 만한 것은 없었다.
게다가 카나본 경이 외환거래에 실패해서 자금의 여유가 없어진 나머지 카터에게 발굴 중지를 요구하게 된다.
이에 카터는 딱 한 계절만 발굴을 더 해줄것을 끈질기게 요구한 끝에 카나본 경의 의지를 꺾고 한계절 더 발굴을 연장하게 된다.
단 이것이 마지막 기회로 왕묘를 발굴하지 못하면 발굴권은 반환하기로 했다.
최후의 기로에 선 카터는 람세스 6세의 무덤 발굴 때 만든 인부들의 작은 오두막이 있던 곳을 선택하고 그간의 왕들의 계곡 발굴 기록들을 상세하게 조사하고 순서있게 발굴을 계속하면서 람세스 2세와 메렌프타의 항아리가 13개 수납되어 있던 창고등을 발견했다.
그리고 마침내 거의 포기직전인 1922년 11월 4일 투탕카멘의 왕의 무덤을 발굴했다.
계곡 밑에선 밀폐된 무덤의 출입구로 이어지는 바위 층계를 발견한 것이다.
카터는 매장실 주위의 한 밀폐된 방에서 파라오의 미라를 발견했는데 세개의 외부 관 안에 매장된 이후 누구의 손도 닿지 않은 순금으로 만든 내부 관이 있었다.
사진에서 카터는 가장 안쪽 관에 부은 굳은 송진을 조심스럽게 벗겨내고 있다.
미라의 팔은 갈고리 모양의 왕홀과 회초리를 쥔 채 십자로 엇갈려있고 황금 데스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파이앙스 도자기, 유리, 홍옥수, 청금석 등으로 세공된 마스크에는 석영과 흑요석으로 만든 살아있는 듯한 눈동자가 박혀 있었다.
이 화려한 마스크 뒷면에는 <사자의 서>의 본문이 새겨져 있다.
투탕카멘 왕묘를 발굴할 때는 많은 에피소드가 있었는데 카터가 키우던 애완새 카나리아가 코브라에게 먹히자 발굴 인부들은 발굴작업에 불길한 징조라고 두려워 하였다.
코브라는 이집트 왕의 머리를 장식하는 동물이었기 때문이다.
발굴이 진행되던 1923년 카나본 경이 사망하자 투탕카멘왕의 저주를 받아 사망하였다는 소문이 퍼졌다.
그 후 6년에 걸쳐 발굴작업이 계속진행되었고 이집트학에 풍부하고 중대한 공헌을 하였다. 투탕카멘의 눈부시게 아름다운 보물들을 원래 모습 그대로 볼 수 있는것은 카터가 발견했기 때문이다.
카터는 투탕카멘왕묘의 발굴을 마지막으로 더이상 발굴작업을 하지 않았으며 1932년 영국으로 돌아갔다.영국에 돌아가서도 강연등으로 하루하루 생계를 유지했으며 결혼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1939년 65세의 나이로 런던에서 임종을 맞이했다.
'학문적인 연구가 끝나면 파라오는 그의 묘로 돌아가기를 바란다' 는 카터의 희망대로 투탕카멘은 현재 자신의 묘에서 관광객에게 전시되고 있다.
자료 출처 : 엔조이이집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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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1년부터 8년간 베니하산과 아마르나 등으로 유명한 고고학자 페트리를 비롯한 탁월한 고고학자들 밑에서 충실히 임무를 수행하다 이집트의 고고청 장관이던 마스페로의 눈에 띄어 1899년에는 이집트 누비아 지역의 인스펙터(우적 감사관)에 임명되었다.
관광 차 이집트에 왔다가 진심으로 매료된 미국의 갑부 시어도어 데이비스를 만나게되고 그는 '왕들의 계곡'을 깊이 발굴해보자고 제안하게 된다(발굴에는 자금이 많이 들기때문에 후원자가 필요하다)
데이비스는 명성을 높이기위해 후원을 약속하고 카터는 그의 지원속에서 투트모세
4세의 무덤을 발견했다.
발견은 했지만 너무 번거로보여 아무도 손을 대지 않은 채 황폐해져 있던 무덤 KV20.
이것을 일년에 걸쳐 파내려가서 마침내 현실에 도착해 하트셉스트 여왕의 무덤임을 밝혀냈다. 고고국은 왕묘내에 전기를 끌어들여 조명을 밝혀서 관광객이 즐길수 있도록 했다. 예전에 발견된 세티 2세나 메렌프타의 무덤을 청소하다가 하트셉스트의 유모 무덤을 발견하기도 했다.
1904년 카터는 하이집트 지역의 인스펙터로 승진하여 룩소르에서 카이로로 전근을 가게되었다. 그리고 그 직후 일이 생기고 말았는데 카터가 사카라의 계단식 피라미드로 사찰을 나갔을 때였다.
그 곳에는 여러 명의 프랑스인 남녀가 와인을 마시며 소란을 피우고 있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이집트 법률에는 유적 안에서 뭘 먹는다든지 소란을 피운다든지 하면 안되게 되어 있었다.
카터는 당장 “멈추시오”하고 주의를 주었다. 그러나 프랑스인들은 말을 듣지 않았다.
몇 번이나 주의를 주는 사이 입씨름이 벌어졌고, 그들 중 한 명이 “너무 건방지게 굴면 당신 해고시킬거야. 내 숙부가 높은 자리에 있어.” 하고 협박을 해왔다.
카터는 화가 치밀었다. “보자 보자 하니 정말 심하군. 어디 해고할 수 있으면 해고해보시지”
그런데 이 와중에서 카터를 지켜주려던 수위가 그 프랑스인을 때려 눕혀 경찰서에 갇히고 말았다. 더구나 그 프랑스인의 숙부인지 진짜 고위 공무원이었으니 세상 일이란 정말 알 수 없는 것이다.
결국 사건은 두 나라 사이의 국제문제로 비화되었고 그 프랑스인들은 영사관을 통해서 카터에게 사과를 요구해왔다. 그러나 카터는 응하지 않고 결국 해고당하고 말았다
대쪽같은 성격으로 인해 고난의 길을 걷는 그는 직장은 잃었지만 이집트를 떠나고 싶지 않아서수채화가로 일하며 조촐하게 살았다.
천직이라고 여길정도로 좋아하는 직업을 잃는다고 해도 자신의 양심에 위배되는 일은 하지않는 강철같은 의지를 보여주는 좋은 일화이다.
자료 출처 : 엔조이이집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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